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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사타쉬 쿠마르
작성자 임종훈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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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07-03-27 10: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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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873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사타쉬 쿠마르(Satish Kumar)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이자 교육자. 아홉 살에 자이나교의 승려가 되었다가 열여덟에 새로운 내면의 소리에 따라 새인도와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간디의 구상을 실현시키는 토지개혁 운동에 헌신했다. 그 뒤 반핵운동에 앞장선 버트란드 러셀의 모범에 자극받아 무일푼으로 걸어서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까지 평화를 위한 순례를 했다. 1973년에 영국에서 프리츠 슈마허를 만나 생태학 잡지《Resurgence 소생》편집을 맡으면서 여러 정신, 교육 사업을 이끌어왔다. 이 글은 1993년 4월 3일에 영국의 '과학 의료 네트워크'가 조직한 '신비가들과 과학자들'이라는 주제의 모임에 초청받아 이야기한 것을 발췌하여 녹색평론 13호에 실었던 글이다.

 어머니는 가장 좋은 스승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가장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대학에 다니지도 않았고 학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흔히 하는 말로 나는 교육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의 스승도 역시 교육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가장 훌륭한 스승인 우리 어머니에게 가장 깊은 존경심을 보냅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그리고 특히 이 방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어머니인 당신들보다 더 좋은 스승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학도, 학교도, 책도, 다른 무엇도 어머니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의 스승이며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나는 순례와 여행을 하면서 러셀 박사, 마틴 루터 킹, 나의 또 다른 스승 비노바 바브 같은 현명한 분들을 많이 만났고 또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은혜를 입은 슈마허 같은 분들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에게 배운 것과 어머니가 갖고 계신 지혜는 독특하고 뛰어난 것이었고, 나는 누구도 어머니보다 윗자리에 둘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에서는 어머니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친다고 느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기 생각이나 관념, 견해를 나에게 준 일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주었을 뿐입니다.
  나중에 칼릴 지브란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칼릴 지브란이 시에서 쓰고 있는 것을 우리 어머니는 실제로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이《예언자》를 읽으셨으리라 생각하는데 그 속에 아이들에 대한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갈망하는 생명이다'라는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이 우리가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릴 지브란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어도 되지만 생각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들, 우리 대학과 정부, 교육기관들은 밤낮으로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 케케먹고 쓸모없는,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생각들을 쏟아 넣느라고 바쁘게 바쁘게 돌아가면서 사랑은 한 조각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이들이 텅 빈 물통이어서 온갖 쓰레기와 먼지를 그 속에 쏟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서라도 말입니다. 때때로 지옥으로 가는 길도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아이가 텅 빈 물통이 아닙니다. 아이는 하나의 씨앗, 한 개의 도토리입니다. 우리는 "아니 어린애잖아, 가만있으라고 해. 아이들은 몰라. 경험이 없거든. 나는 나이를 먹었으니 내가 더 많이 알아."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모든 걸 알고 있다. 네 속에, 너의 영혼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 도토리처럼!" 삼림전문가난 정원사나 어느 누구도 도토리에게 참나무가 되는 방법을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 작은 씨앗, 도토리 속에 참나무가 되는 방법에 대한 모든 정보가 씌어 있습니다. 글로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오만하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이크로칩이나 컴퓨터 디스켓, 컴팩트 디스크 같은 멋진 것들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가. 이 디스크 하나에 몇 메가바이트를 저장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조금 겸손해져서 도토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 수백 년을 살면서 수백만개의 도토리와 나뭇잎과 가지들을 만들어낼 저 조그만 도토리 속에는 몇 메가바이트의,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아이와 도토리를 모두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와 모든 어머니 여러분에게 존경심을 보냅니다.

걷기를 배우며

  어머니가 나에게 주로 말한 것은 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걷는 것이 뭐 특별한 것인가?'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마치 다리가 없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걷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맨발로, 땅에 발을 대고 땅과 흙을 밟는 것을 명상하면서 걷는 방법 말입니다. 발 밑에 흙을 두지 않고서는 영혼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soul'(영혼)과 'soil'(흙)은 같은 뿌리, 같은 말, 같은 소리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할 수 있으면 맨발로 땅을, 흙을 밟으십시오. 직접 접촉하십시오. 맨발로 흙 위를 걸으면 반사신경 전문가가 마사지를 해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땅이 마사지를 해주고 식물이 해줄 것입니다. 모든 식물은 약효를 갖고 있고 그 속을 걸음으로써 주사를 맞거나 알약들을 먹지 않고 필요한 온갖 약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발 밑에 어머니인 대지가 모든 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자연은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자연은 붓다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모하메드보다도 간디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이들도 자연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은 왜 깨달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나무 밑에 가서 앉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새롭게 채울 시간이 없습니다. 나무 밑에 가서 앉아 명상을 하고 새들이 날아와 가지에 앉는 것을 바라볼 때 영혼이 새롭게 채워집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은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잊어버렸습니다.

꿀벌을 보아라

  어머니는 "꿀벌을 보아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꿀벌은 얼마나 좋은 스승입니까? 꿀벌은 꽃에서 꽃으로, 한 꽃에서 꿀을 조금씩 따면서 날아다닙니다. 어떤 꽃도 "꿀벌이 와서 내 꿀을 가져가 버렸어."하고 불평하는 일이 없습니다. 꿀벌은 꽃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고 꽃과 벌꿀사이에는 완전히 폭력이 없는 관계, 해를 끼치지 않는 관계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울 수 있을까요? 인간사회가 땅에서 무엇을 캐내거나 얻어내려고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빼앗고 빼앗고 해서 마침내 바닥나고 고갈되어 그 자원이 끝장날 때까지 갑니다. 우리는 꿀벌에게서 조금만 얻어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그 이상은 아니고요.
  자연에게 무엇인가를 얻고나서 꿀벌은 무엇을 합니까? 그것을 달콤하고 맛있고 영양분이 많은 꿀로 바꿉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꿀벌에게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산업화되고 현대적인, 기술주의적인, 합리적인, 선진적인, 진보적인, 발달된--이것은 모두 한 흐름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우리 사회는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꿀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어디든 큰 도시 바깥으로 나가 보십시오. 뉴욕, 시카고, 런던, 델리, 봄베이, 어디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내고 던져버린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쓰레기와 오염의 산더미들! 공기가 오염되고 물이 오염되었고 흙이 오염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짓입니까?
  자연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꿀벌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얻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든지 변화시키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꿀처럼 신성하고 맛있고 달콤한 것으로 변화시키세요.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지혜를 말하지만은 않습니다. 몸으로 지혜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을 얘기하겠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솜씨가 좋습니다.   어머니는 손을 쓰지요. 아름답고 다채로운 실과 거울조각들, 조그만 바늘을 가지고 바느질을 해서 멋진 숄이나 치마나 블라우스를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누이는 "어머니, 숄 하나 만드는 데 너무 오래 결려요. 여섯 달이나요. 제가 어머니께 선물을 할게요. 수놓는 기계를 사드리겠어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왜? 왜 수놓는 기계를 사준다는 거냐?"
"시간을 절약해줄 테니까요!""시간을 절약해? 시간이 부족하니? 신이 시간을 만들 때 넉넉히 만들었단다. 어리석은 아이야. 무한한 것을 절약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너는 한도가 있는 것을 소비하려고 하고 있어. 전기니, 금속이니, 기계를 만드는 데 쓰는 모든 재료들, 그런 것은 한도가 있는 자원이지. 너는 무한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한도가 있는 자원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만둬, 나는 바늘을 쓰는 게 좋아!"
  바늘은 사람이 손수 만든 가장 작은 연장입니다. 땅에서 조그만 금속 한 조각을 얻으십시오. 꿀처럼, 이 작은 바늘을 말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명상하며 앉아서 당신의 사랑을 그 속에 넣으십시오. 그것이 예술입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동안 당신의 손 속에 사랑을 담을 때 당신은 무엇인가를 숄처럼 아름다운 물건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어머니나 나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은 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 숄은 무척 아름다워요. 그렇지만 저는 이걸 쓸 수가 없어요.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벽에 걸어놓고 싶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말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그러지 마라. 네가 그걸 썼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것들을 벽에다 걸어두기 시작하면 보기 싫은 것들을 몸에 지니게 된단다. 왜 보기 싫은 것을 몸에 지니고, 벽에 걸려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든단 말이냐?" 이 말에는 아주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깊고 심오한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예술작품은 너무나 벽 위주로, 너무나 작품 위주로 되어 버렸습니다. 예술은 화랑에 있어야 되고 무대에 있어야 되고 미술관에 있어야 되는 걸로 말입니다.
  그리고 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 방을 나가서 저기서 있는 건물을 보십시오. '예술 센터'라는 곳입니다. 저 건물이 예술센터처럼 보입니까? 예술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만들든지, 구두든 옷이든 음식을 담는 접시든 의자든 다른 무엇이든지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람의 솜씨와 사람의 도전이 개입되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는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흙이나 벽돌이나 나무나 금속이나 무엇이든지 가지고 아주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기뻐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것은 변화의 예술이며 바로 교육의 핵심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될 수 없다면 교육이 아닙니다.

 작은 학교 - 촛불 밝히기

  어둠을 저주하고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정부와 교육기관과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거대한 학교들을 계속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비판에서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문제에 부닥쳤을 때 나는 아이들이 아침마다 하트랜드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바이드포드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열한 살짜리 아이가 아침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 날마다 두 시간씩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열한 살부터 통근자의 삶을 시작하는 거지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통학을 시작하는 게 낫지. 남은 평생동안 통근을 하며 지내야 할 테니까.'하고 말입니다. 나는 우리 두 아이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보면 천오백 명, 이천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숫자가 되어버립니다. 아이를 알지 못한다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와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아이를 가르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칠판 옆에 서서 "나는 수학선생이다. 나는 영어선생이다. 나는 불어선생이다. 나는 과학선생이다."하고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수학이나 과학이나 영어의 선생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선생이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아이들의' 선생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이나 물리 따위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 신뢰 관계를 만들기 위한 구실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흔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서른명, 스물다섯 명 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으며, 이천명, 천오백 명 되는 아이들을 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까? 모든 학교는 생활하고 학습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를 학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장의 복제품, 지식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학교는 가정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따뜻하고 신뢰할 수 있고 친근하고 두려움이 없는 가정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정부에 영향력이 없습니다. 대중매체에도 영향력이 없습니다. 교장이나 놓은 교육관리들에게도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만들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원칙에 근거한 조그만 학교를 하트랜드에 세우자.'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학교를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라고 불렀고 아이들 서른 명이 모였습니다. 그 학교는 독립된 학교지만 공립학교는 아닙니다. 돈을 내는 학교도 아니고 부유한 부모를 위한 학교도 아닙니다. 배경이나 능력이 어떻든 하트랜드에 사는 어린이로서 오고 싶어하는 아이들 모두를 위한 학교입니다. 전혀 돈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려뽑지도 않는 보통 지역학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를 가정의 연장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중심은 무엇인가? 가정의 심장은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내 경험으로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엌입니다. 또 하나는 난로입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한 불가에 모입니다. 불이, 타고 있는 살아 있는 불이 옛날부터 모든 가정의 중심입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는 중앙난방시설을 갖고 있지만요!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불을 피웁니다. 아이들이 둘레에 모여서 몸을 따뜻이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부엌도 두어서 건강에 좋은 빵을 아이들이 날마다 구워냅니다. 여러 가지 음식 만들기가 교과과정의 하나로서, 교육의 한 부분이 됩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그런 것처럼 음식 만들기가 귀찮은 집안일이나 짐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식 만들기는 가장 기본이 되는 한 과목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교육

  무엇이 사람에게 필요합니까? 음식과 옷, 집,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에 기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학교가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식물을 키우는지, 음식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음식의 영향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까? 없습니다. 있어도 아주 적습니다. 그것도 구석진 곳 어디에 - 가정학인가 뭔가 하는 곳에 - 조그맣고 특별한 것으로 끼여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배움으로서 우리는 음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음식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음식은 우리 건강에 기본이 되는 것인데,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음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은 학교에서는 채소밭과 부엌을 두고 음식을 학습도구, 교육의 기본 도구로 삼을 것입니다." 당신이 심성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고약한, 포장되고 깡통에 든 신선하지 못한 음식이 주어질 때 어떻게 교육을 하겠습니까? 낡은 지식, 책에서 나온 신선하지 못한 정보처럼 깡통에 담긴 신선하지 못한 음식이라니요! 학교는 모두 제대로 된 음식을 우리 교육 속에 되가져와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는 수많은 이론과 가설을 가진 대단한 전문가가 아닙니다. 나는 단순한 상식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이제는 상식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뭐지요? 옷입니다. 작은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은 옷을 디자인하는 법, 천을 짜는 방법, 털실을 잣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집입니다. 우리는 나무일을 할 수 있는 작업장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작업장을 짓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면 많은 돈이 들텐데, 돈도 없고 후원자가 꾸려가는 자선학교가 어떻게 그만한 돈을 구하겠습니까? 어쨌든 건물은 우리 생활의 토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작업장을 짓게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좋다. 작업장 설계를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설계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건축관계 공무원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 사람은 "아이들이 작업장을 지으려고 설계허가 얘기를 하러 온 일은 한 번도 없는데"하며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아주 좋아했고 무척 호의를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학교에 와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좋구나, 그렇지만 이것은 옳지 않아. 저건 잘못되었고. 이것을 바꾸고 저것을 고치면 설계허가를 해주마." 그래서 우리는 설계를 변경하고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년 걸려서 우리는 근사한 작업장을 지었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합니다. 사람들에게 그 작업장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지었어요."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과과정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학구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GCES(중등교육 학력평가) 시험도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학과시간의 절반이면 충분합니다.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나머지 반은 정신, 영혼, 마음, 몸, 상상력, 시, 연극같이 측정하고 평가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교육하는 시간입니다. 진정한 교육, 진정한 학습은 평가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시에서 GCES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상상력이나, 영성이나 텃밭가꾸기에서 GCES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학교로 우리는 하나의 모범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선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학교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기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더비셔에 하나, 도셋에 하나, 스코틀랜드에 하나, 브리스톨에 하나, 그밖에 여러 곳에 비슷한 학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향력이 더 미친다면, 공장 같은 커다란 대규모 학교, 아이들은 숫자에 지나지 않고 탁아소나 아이 봐주는 곳 같은 학교는 원하지 않는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면, 그렇다면 정부가 생각을 바꿀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학교를 더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작은 학교에 반대하는 한 가지 논거가 있습니다. 정부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건 비경제적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작은 학교들을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여기에 맞서는 나의 주장은 - 약간 놀리는 투로 말이지요 - 하느님의 계획은 두 부모에 한 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이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를 만들어내고 한 아이를 교육하는 데에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만일 하느님에게 두 사람에 한 아이가 교육받게 할 여유가 있다면 적어도 우리 정부는 선생님 하나에 열 명, 열다섯 명의 아이를 맡길 여유가 있습니다. 왜 안됩니까? 더 진지하게, 작은 학교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표준교육보다 더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디본 카운티가 디본의 아이 하나에 쓰는 돈보다 조금 덜 씁니다. 우리가 교육을 조직하는 방법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돈이 더 들지 않습니다.

  하트랜드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 번창하고 아름답고 전통이 살아 있는 좋은 영국 마을입니다. 지금 이 마을에는 도자기 굽는 사람, 집짓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정원 돌보는 사람, 음악가, 미술가, 시인, 작가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마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를 시작할 때 나는 마을의 도공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시작합니다. 정규 도자기 선생님을 모실 여유가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셔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네, 기쁘게 하지요. 날마다 도자기만 만드는 게 지루해졌습니다. 하루를 비워서 아이들을 가르치겠어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겁니다. 그 사람에게 하루 분의 돈을 주면 됩니다. 그저 푼돈이지요. 이런 식으로 농부와 집짓는 이, 목수 같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루나 반나절 또는 필요한 시간만큼 옵니다. 와서 실제로 필요한 것들을 가르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가 자기들의 학교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 모두를 저마다 잘 압니다. 그저 정보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고, 전시하고, 팔고, 도자기에 대해 장부를 정리하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생생한 모범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선생님은 그저 교실에 와서 몇 가지를 가르치고는 자기 집으로 달아나버리고 아무도 그 선생님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트랜드의 작은 학교에서 우리는 마을 전체가 우리의 학교라고 말합니다. 학교 모임이 있고 부엌이 있고 선생님들이 있는 그 건물만이 학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을 전체가 학교, 우리의 학교입니다. 그러니까 학교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에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그러면 당신은 심성교육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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